은하 중심에 블랙홀이 없다면? 페르미온 덩어리 가설의 진실

은하 중심에 블랙홀이 아닌 게 있을 수도 있다는 주장

블랙홀 시리즈를 쓰면서 은하 중심에는 초대질량 블랙홀이 있다는 걸 당연하게 전제하고 글을 써왔어요. 궁수자리 A*는 태양 질량의 400만 배, M87은 65억 배. 근데 자료를 계속 읽다 보니까 이걸 의심하는 가설이 있더라고요. 은하 중심에 있는 건 블랙홀이 아니라 암흑물질 입자가 뭉쳐 있는 덩어리일 수 있다는 거예요. 페르미온 덩어리 가설이라고 불러요. 처음에는 좀 황당하다 싶었는데, 찾아보니까 논문도 꽤 나와 있고 진지하게 다뤄지는 주제였어요.


암흑물질 입자가 뭉치면 블랙홀과 비슷해 보인다

핵심 아이디어는 이래요. 암흑물질 입자가 페르미온이라고 가정하면, 이 입자들이 자체 중력으로 뭉칠 수 있어요. 페르미온은 같은 양자 상태를 공유하지 못하는 입자인데, 전자나 중성미자가 대표적이에요. 이 입자들이 엄청난 양으로 모이면 파울리 배타원리에 의한 축퇴압이 중력과 균형을 이뤄서 안정적인 덩어리를 만들 수 있어요. 중성자별이 중성자의 축퇴압으로 버티는 것과 비슷한 원리예요.

이 덩어리가 충분히 무겁고 작으면, 바깥에서 보기에 블랙홀과 거의 구분이 안 돼요. 주변 별이 빠르게 공전하는 것도 설명이 되고, 빛이 휘는 것도 설명이 돼요. 블랙홀이 아니라 아주 촘촘하고 무거운 암흑물질 공이라는 거예요.

RAR 모형이라는 게 있다

이 가설을 가장 체계적으로 발전시킨 게 RAR 모형이에요. 루피니-아르구에예스-루에다 모형이라고 하는데, 이탈리아와 아르헨티나 연구팀이 2015년부터 발표해온 일련의 논문이에요. 일반 상대성 이론 안에서 자기 중력으로 뭉친 페르미온 시스템의 평형 상태를 계산한 거예요.

이 모형의 특이한 점은 은하의 중심부와 바깥 헤일로를 하나의 구조로 설명한다는 거예요. 중심에는 아주 촘촘한 양자 코어가 있고, 바깥으로 갈수록 희석되는 헤일로 구조가 자연스럽게 이어져요. 페르미온 질량이 약 48~345keV 범위일 때 우리 은하의 회전 곡선을 잘 맞출 수 있다고 해요.

저는 이 부분이 좀 의외였어요. 은하 중심의 초대질량 천체와 은하 전체를 감싸는 암흑물질 헤일로를 하나의 입자로 동시에 설명하려는 시도라는 게요. 보통은 이 두 가지를 별개의 문제로 다루거든요.

S2 별 궤도는 통과했다

은하 중심에 블랙홀이 있다는 증거 중 가장 강력한 게 S2 별의 궤도예요. 궁수자리 A* 주변을 16년 주기로 도는 별인데, 가장 가까이 다가갈 때 속도가 광속의 3% 가까이 돼요. 이 궤도를 분석하면 중심 천체의 질량을 알 수 있어요.

RAR 모형 연구팀은 자기들의 페르미온 코어 모형으로도 S2 궤도를 설명할 수 있다고 주장해요. 페르미온 질량이 약 56keV일 때, S2의 궤도와 궤도 세차 현상까지 맞출 수 있다는 계산 결과를 2023년에 발표했어요. 궤도 세차란 S2의 타원 궤도가 매번 조금씩 회전하는 현상인데, 일반 상대성 이론이 예측한 대로 관측된 거예요. 이걸 페르미온 덩어리로도 설명할 수 있다는 거예요.

다만 이건 한쪽의 주장이에요. S2 궤도 데이터를 분석한 유럽남방천문대의 GRAVITY 연구팀은 데이터가 축퇴 페르미온 물질일 가능성을 배제하고 블랙홀에 대한 증거를 보강한다고 결론지었어요.

EHT 그림자가 핵심 시험대다

S2 궤도만으로는 결정적인 구분이 안 돼요. S2가 가장 가까이 접근할 때 궁수자리 A*까지의 거리가 약 120AU인데, 사건의 지평선 크기는 이보다 훨씬 작거든요. S2는 블랙홀 바깥에서 멀리 돌고 있는 거예요. 그 정도 거리에서는 블랙홀이든 같은 질량의 페르미온 덩어리든 중력이 비슷하게 작용해요.

차이를 보려면 사건의 지평선 근처까지 들여다봐야 해요. 그래서 EHT의 블랙홀 그림자 관측이 중요한 거예요. 블랙홀이면 사건의 지평선이 있으니까 그림자가 생기잖아요. 페르미온 덩어리면 사건의 지평선이 없어요. 그럼 그림자 모양이 달라질 수 있어요.

실제로 2022년에 EHT가 궁수자리 A*의 그림자를 공개했을 때, 관측된 그림자 크기와 형태가 일반 상대성 이론이 예측하는 슈바르츠실트 블랙홀과 잘 맞았어요. 이게 페르미온 덩어리 가설에는 좀 불리한 증거예요. 다만 RAR 모형 연구팀은 충분히 밀집된 페르미온 코어도 비슷한 그림자를 만들 수 있다고 주장하기는 해요.

질량에 한계가 있다

페르미온 덩어리에는 태생적인 한계가 하나 있어요. 오펜하이머-볼코프 한계라는 건데, 축퇴압으로 지탱할 수 있는 최대 질량이 정해져 있어요. 페르미온 입자 질량이 약 48~56keV일 때 페르미온 덩어리의 최대 질량은 태양의 약 1억 배 정도예요.

궁수자리 A*는 태양의 400만 배니까 이 한계 안에 들어요. 근데 M87은 태양의 65억 배예요. 1억 배를 훨씬 넘어요. 그러니까 페르미온 덩어리 가설로는 M87 같은 초대질량 블랙홀은 설명이 안 돼요. 이 한계를 넘는 질량의 천체는 페르미온 덩어리일 수 없고, 블랙홀이거나 다른 뭔가여야 해요.

RAR 모형 연구팀은 이 점을 인정해요. 오히려 페르미온 코어가 바리온을 흡수하면서 한계 질량을 넘기면 중력 붕괴를 일으켜서 블랙홀이 될 수 있다는 시나리오를 2024년 논문에서 제시했어요. 페르미온 덩어리가 블랙홀의 씨앗이 될 수 있다는 거예요. 그러면 초대질량 블랙홀의 형성 문제도 풀릴 수 있고요.

블랙홀이 맞다는 쪽이 압도적이다

솔직히 말하면 현재 증거는 블랙홀 쪽이 압도적으로 유리해요. S2 궤도, EHT 그림자, 중력파 관측까지 전부 블랙홀 모형과 맞거든요. GRAVITY 연구팀의 분석도 블랙홀을 지지하고 있고요. 페르미온 덩어리 가설은 기존 관측을 어느 정도 맞출 수는 있지만, 블랙홀보다 더 잘 맞추는 건 아니에요.

그럼에도 이 가설이 완전히 무시되지 않는 이유가 있어요. 암흑물질의 정체를 아직 모르거든요. 암흑물질이 진짜 페르미온이라면 은하 중심에서 어떤 구조를 만드는지는 당연히 따져봐야 할 문제예요. 그리고 은하 중심의 암흑물질 분포와 초대질량 블랙홀의 기원을 동시에 설명하려는 시도 자체가 가치가 있어요.

대안이 있어야 검증이 된다

블랙홀 시리즈를 쓰면서 블랙홀의 존재를 당연하게 깔고 갔는데, 이번에 반대쪽도 들여다봤어요. 결론은 달라지지 않았어요. 현재까지의 증거로는 은하 중심에 블랙홀이 있다는 게 가장 설득력 있어요.

다만 한 가지 남는 게 있어요. 이전 글에서 특이점이 이론의 한계를 보여주는 표지판이라고 썼었는데, 페르미온 덩어리 가설은 그 한계에 대한 하나의 대안인 거예요. 블랙홀이 맞다는 걸 확인하려면 블랙홀이 아닌 경우와 비교해야 하니까요. 비교 대상이 없으면 검증도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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