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러 행성에서 1시간이 지구의 7년이라는 장면
블랙홀 관련 글을 몇 편 쓰면서 자연스럽게 인터스텔라를 다시 보게 됐어요. 예전에 극장에서 봤을 때는 그냥 울었는데, 이번에는 다른 게 보이더라고요. 밀러 행성 장면이요. 블랙홀 옆에 있는 행성에 내려갔다가 3시간 만에 돌아왔는데, 모선에서 기다리던 동료한테는 23년이 지나 있잖아요. 밀러 행성의 1시간이 지구 시간으로 7년. 이게 영화적 과장인 줄 알았는데, 찾아보니까 과학적으로 가능한 설정이었어요.
중력이 세면 시간이 느려진다
핵심 원리는 아인슈타인의 일반 상대성 이론이에요. 1915년에 발표된 건데, 핵심은 간단해요. 중력이 강한 곳에서는 시간이 느리게 흘러요. 중력이 약한 곳에서는 빨리 흘러요. 이게 전부예요.
왜 그런지 좀 더 들여다봤어요. 아인슈타인에 따르면 중력은 시공간을 휘게 만들어요. 무거운 물체가 있으면 그 주변의 시간과 공간이 찌그러지거든요. 트램펄린 위에 무거운 공을 올리면 천이 움푹 들어가는 것처럼, 질량이 큰 천체는 주변 시공간을 깊게 휘게 만들어요. 시공간이 많이 휘어진 곳에서는 시간도 그만큼 느리게 가는 거예요.
이건 비유가 아니라 실제로 측정 가능한 현상이에요.
GPS가 매일 이걸 보정하고 있다
저는 이 부분에서 좀 놀랐어요. 중력에 의한 시간지연이 지금 이 순간에도 일어나고 있다는 거거든요. GPS 위성이 대표적인 예예요.
GPS 위성은 지표면에서 약 20,800km 상공에 떠 있어요. 지구 표면보다 중력이 약한 곳이에요. 일반 상대성 이론에 따르면 중력이 약한 곳에서는 시간이 빨리 가니까, 위성의 시계는 지상 시계보다 하루에 약 45마이크로초 빨라져요. 거기에 위성이 빠르게 이동하면서 특수 상대성 이론에 의한 시간지연이 반대로 7마이크로초 발생하고요. 합치면 하루에 약 38마이크로초의 오차가 생겨요.
38마이크로초가 별거 아닌 것 같지만, 이걸 보정 안 하면 GPS 위치가 하루에 약 11km씩 틀어져요. 내비게이션이 쓸모없어지는 거예요. GPS 관리 당국이 매일 이 오차를 보정해주고 있어요. 상대성 이론이 틀리면 GPS가 작동을 안 한다는 뜻이에요.
2014년에는 유럽의 갈릴레오 위성 2대가 발사 사고로 잘못된 타원 궤도에 올라갔는데, 이게 오히려 아인슈타인의 중력 시간지연을 더 정밀하게 검증하는 기회가 됐어요. 타원 궤도니까 지구에 가까워졌다 멀어졌다를 반복하잖아요. 그때마다 중력 차이에 따라 원자시계 속도가 달라지는 걸 직접 측정한 거예요.
블랙홀 옆이면 그게 극단적이 된다
GPS 위성에서의 시간 차이는 하루에 38마이크로초예요. 사람이 느낄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에요. 근데 블랙홀 옆이면 얘기가 달라져요. 블랙홀은 중력이 극단적으로 세니까 시공간의 왜곡도 극단적이거든요.
인터스텔라의 가르강튀아는 태양 질량의 1억 배짜리 초대질량 블랙홀이에요. 킵 손이라는 물리학자가 직접 계산한 설정인데, 이 블랙홀은 거의 광속에 가깝게 회전하고 있어요. 회전하는 블랙홀은 주변 시공간을 끌고 돌아가는 효과가 있는데, 이걸 프레임 드래깅이라고 해요. 이 효과까지 합치면 블랙홀 가까이에서의 시간지연이 극단적으로 커져요.
밀러 행성은 이 블랙홀의 바로 곁에 있어요. 킵 손의 계산에 따르면 밀러 행성에서의 시간은 지구보다 약 6만 1천 배 느리게 흘러요. 1시간이 7년이 되는 비율이에요. 이건 킵 손이 일반 상대성 이론 방정식으로 직접 계산한 수치라고 해요.
파도도 과학적 근거가 있었다
밀러 행성의 거대한 파도도 그냥 넣은 게 아니었어요. 블랙홀에 가까이 있으니까 조석력을 엄청나게 받거든요. 조석력은 이전 글에서 다뤘던 그 힘이에요. 가까운 쪽과 먼 쪽의 중력 차이로 물체가 찢기는 힘. 밀러 행성에서는 이 조석력이 바닷물을 잡아당겨서 약 1.2km 높이의 거대한 파도를 만들어요.
킵 손의 저서 인터스텔라의 과학에 따르면, 밀러 행성은 가르강튀아의 조석력에 완전히 구속돼 있지 않고 좌우로 흔들리고 있대요. 이 흔들림 때문에 바닷물이 요동치면서 주기적으로 거대한 파도가 행성 전체를 돌고 있는 거예요. 영화에서 파도가 약 1시간 간격으로 오는 것도 이 흔들림 주기에 맞춘 거고요.
다만 여기서 좀 무리한 부분도 있어요. 밀러 행성이 그 정도로 블랙홀에 가까이 있으면 조석력 자체가 행성을 파괴할 만큼 강해야 한다는 지적이 있거든요. 킵 손은 가르강튀아가 초대질량 블랙홀이라 사건의 지평선 근처에서의 조석력이 상대적으로 약하다는 논리로 설명하는데, 이 부분은 학자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갈린대요.
영화에서 생략한 것들
시간지연과 파도의 과학적 근거는 꽤 단단해요. 근데 영화가 생략하거나 바꾼 부분도 있었어요. 찾아보니까 몇 가지 나오더라고요.
밀러 행성이 가르강튀아에 그렇게 가까이 있으면 하늘의 절반을 블랙홀이 차지해야 해요. 근데 영화에서는 밀러 행성에서 블랙홀이 달의 20배 정도 크기로만 보여요. 놀란 감독이 나중에 블랙홀 스윙바이 장면의 시각적 임팩트를 위해 의도적으로 줄였다고 밝혔대요. 킵 손도 그 결정에 대해 비난할 수 없었다고 했고요.
또 하나, 밀러 행성의 시간이 6만 배 이상 느리다는 건 선발대원 밀러가 행성에 도착한 지 2시간도 안 됐다는 뜻이에요. 밀러가 보낸 신호를 신뢰할 만한 데이터로 보고 행성 탐사를 결정한 건 꽤 무모한 판단이에요. 이건 과학의 문제가 아니라 플롯의 문제인데, 저도 다시 보면서 그제서야 알아챘어요.
실화라는 건 이런 뜻이다
중력에 의한 시간지연은 실제로 존재하는 현상이에요. GPS가 매일 보정하고 있고, 갈릴레오 위성으로 정밀 측정까지 됐어요. 인터스텔라의 밀러 행성은 이 원리를 블랙홀이라는 극단적 환경에 적용한 거예요. 킵 손이 일반 상대성 이론 방정식으로 직접 계산한 수치를 바탕으로 만든 설정이고, 1시간이 7년이라는 비율도 이론적으로 가능한 범위 안에 있어요.
물론 영화적으로 생략하거나 과장한 부분은 있어요. 근데 시간지연 자체는 허구가 아니에요. 오히려 우리가 매일 쓰는 GPS에도 적용되고 있는 현실이에요. 그걸 블랙홀 옆까지 밀어붙인 게 인터스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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