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킹이 30년 만에 블랙홀 정보 역설 내기를 인정한 이유

야구 백과사전으로 끝난 30년 내기

지난번에 블랙홀 정보 역설을 다루면서 호킹이 2004년에 자기가 틀렸다고 인정했다는 얘기를 잠깐 했어요. 근데 쓰고 나니까 그 장면 자체가 궁금해지더라고요. 30년 가까이 유지한 입장을 왜 바꿨는지, 어떤 논리에 설득됐는지, 상대방은 어떻게 반응했는지. 물리학사에서 꽤 드라마틱한 장면이라 좀 더 파봤어요.


1997년에 세 사람이 내기를 걸었다

1997년에 스티븐 호킹, 킵 손, 존 프레스킬 세 사람이 공식적으로 내기를 했어요. 세 사람 다 칼텍이나 캠브리지 소속의 세계적인 물리학자예요. 내기 내용은 블랙홀에 빠진 정보가 보존되느냐 사라지느냐.

호킹과 킵 손은 정보가 사라진다는 쪽이었어요. 호킹 복사가 블랙홀 내부 정보를 전혀 담고 있지 않으니까, 블랙홀이 완전히 증발하면 정보도 같이 없어진다는 거예요. 존 프레스킬은 반대였어요. 양자역학의 유니터리성은 깨질 수 없으니까, 어떤 메커니즘이든 정보가 보존돼야 한다는 입장이었어요.

상금은 진 쪽이 이긴 쪽에게 백과사전을 사주는 거였어요. 정보를 마음대로 꺼내 볼 수 있는 물건이라는 의미를 담은 거예요.

호킹이 30년간 버틴 근거

호킹의 논리는 단순하고 강력했어요. 1974년에 본인이 발견한 호킹 복사가 순수 열복사라는 거예요. 열복사는 온도에만 의존하고 내부 구성에 대한 정보를 담지 않아요. 같은 질량의 블랙홀이면 안에 뭐가 들어 있든 같은 복사가 나와요. 그러니까 복사에는 정보가 없고, 블랙홀이 증발하면 정보는 사라지는 거예요.

호킹은 이걸 양자역학의 유니터리성이 중력에 의해 깨질 수 있다는 뜻으로 해석했어요. 평탄한 시공간에서는 유니터리성이 유지되지만, 블랙홀처럼 극단적인 시공간에서는 그 원칙이 통하지 않을 수 있다는 거예요. 상당히 대담한 주장이었어요. 양자역학의 기본 원칙을 건드리는 거니까요.

캠브리지 동료인 게리 기번스는 나중에 호킹의 스타일에 대해 이렇게 말했어요. 호킹은 하나의 주장을 내놓으면 더 나은 논리로 뒤집어질 때까지 끝까지 방어하는 스타일이라고요.

끈 이론 쪽에서 반격이 왔다

1990년대에 흐름이 바뀌기 시작했어요. 지난 글에서 다뤘던 서스킨드의 블랙홀 상보성이 나왔고, 엇호프트가 홀로그래피 원리를 제안했어요. 3차원 공간의 정보가 2차원 경계면에 전부 담길 수 있다는 건데, 이 원리를 적용하면 블랙홀 안의 정보가 사건의 지평선 표면에 저장될 수 있어요.

결정적이었던 건 1997년에 말다세나가 발표한 AdS/CFT 대응이에요. 반드시터 공간이라는 특정 시공간에서의 중력 이론이 그 경계면에서의 양자장론과 수학적으로 동치라는 건데, 경계면의 양자장론은 유니터리해요. 그러니까 중력 쪽에서도 유니터리성이 유지돼야 해요. 정보가 보존돼야 한다는 뜻이에요.

이게 나오면서 끈 이론 쪽 물리학자들 사이에서는 정보 보존이 거의 확정된 분위기였어요. 다만 호킹은 바로 인정하지 않았어요. 7년을 더 버텼어요.

2004년 7월 21일, 더블린

2004년 7월 21일, 아일랜드 더블린에서 열린 제17회 국제일반상대성및중력학회에서 호킹이 발표를 했어요. 발표 전부터 호킹이 뭔가 중대한 발표를 한다는 소문이 돌았고, 발표장에 200석 규모의 방에 400명 이상이 몰렸대요.

호킹은 유클리드 경로적분이라는 수학적 기법을 사용해서 자신의 새로운 주장을 펼쳤어요. 블랙홀이 하나의 위상만 가지는 게 아니라 여러 위상을 동시에 가질 수 있고, 모든 위상에 대해 경로적분을 수행하면 정보가 보존되는 결과가 나온다는 거예요. 호킹 자신의 표현으로는 진정한 사건의 지평선은 형성되지 않고 겉보기 지평선만 있다는 거였어요.

발표를 마친 뒤 호킹은 프레스킬에게 토탈 베이스볼이라는 야구 백과사전을 건넸어요. 나중에 호킹은 이렇게 농담했대요. 블랙홀에서 나오는 정보가 쓸모없이 뒤섞인 거라면 백과사전이 아니라 그 재를 줬어야 했다고요.

킵 손은 인정 안 했다

재밌는 건 킵 손의 반응이에요. 호킹과 같은 편이었는데, 호킹이 인정한 뒤에도 손은 인정을 안 했어요. 호킹의 논문을 더 공부해본 뒤 결정하겠다고 했는데, 나중에는 호킹이 맞을 가능성이 높다고는 했지만 공식적으로 내기를 인정하지는 않았대요.

프레스킬도 흥미로운 반응을 했어요. 내기 조건이 상대방이 인정할 때 백과사전을 받는 거였으니까, 호킹이 인정한 이상 받는 건 맞는데 자기가 호킹의 새 주장에 동의하는 건 아니라고 했어요. 호킹의 새 논리가 왜 그렇게 설득력 있는지 자기는 아직 이해를 못 했다고 솔직하게 말했거든요.

이긴 사람도 왜 이겼는지 확신이 없었다는 거예요. 좀 독특한 상황이에요.

인정한 이유를 정리하면

호킹이 30년 만에 입장을 바꾼 이유를 정리하면 크게 세 가지예요.

첫째, AdS/CFT 대응이 나오면서 정보 보존의 이론적 기반이 단단해졌어요. 경계면의 양자장론이 유니터리하니까 중력 쪽도 유니터리해야 한다는 논리가 강했어요. 둘째, 호킹 자신이 유클리드 경로적분으로 계산해봤더니 위상적으로 단순한 경우에서 유니터리 결과가 나왔어요. 본인의 계산으로 확인한 거예요. 셋째, 호킹은 예전에 블랙홀 내부의 특이점이 아기 우주로 통하는 다리가 될 수 있다는 가설을 검토했었는데, 이 경로는 점점 설득력을 잃어갔어요.

호킹은 더블린 발표에서 이렇게 말했대요. 30년 동안 고민하던 문제를 풀어서 기쁘지만, 답이 예전에 자기가 제안했던 것보다 덜 흥미롭다고요. 예전에는 정보가 사라진다는 게 더 극적이고 새로운 물리학이었으니까요.

2012년에 또 문제가 생겼다

호킹이 인정했으니 끝난 줄 알았는데, 2012년에 새로운 역설이 나왔어요. 블랙홀 방화벽 역설이에요. UCSB의 조셉 폴친스키 등이 제기한 건데, 정보가 보존된다면 사건의 지평선에 극고온의 에너지 벽이 있어야 한다는 주장이에요. 이전에 이 시리즈에서 사건의 지평선을 넘는 사람은 아무것도 안 느낀다고 썼었잖아요. 방화벽이 있으면 순간적으로 타죽어요. 등가 원리가 깨지는 거예요.

정보를 보존하면 등가 원리가 깨지고, 등가 원리를 지키면 정보가 사라져요. 둘 다 물리학의 기본 원칙인데 양립이 안 되는 거예요.

프레스킬은 이 방화벽 역설이 나온 뒤에 어쩌면 자기가 틀렸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뒀대요. 내기에서 이겼는데 나중에 다시 고민하게 된 거예요.

물리학자도 틀릴 수 있다는 것

호킹이 입장을 바꾼 건 정보가 보존된다는 쪽의 증거가 충분히 쌓였기 때문이에요. 다만 구체적인 메커니즘은 여전히 논쟁 중이고, 방화벽 역설처럼 새로운 문제도 나왔어요. 지난 정보역설 글에서 다뤘던 아일랜드 공식이 2019년에야 나온 것도, 호킹이 인정한 뒤 15년이 더 지나서야 중력 이론 안에서 페이지 곡선을 재현했다는 뜻이에요.

저는 이 에피소드에서 제일 남는 게 호킹의 태도예요. 30년 동안 지킨 주장을 공개 석상에서 철회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거든요. 호킹 정도의 위치에 있으면 더 그렇고요. 근데 했어요. 본인 계산으로 확인하고 나서요. 프레스킬은 이겼는데 왜 이겼는지 확신이 없었고, 킵 손은 같은 편이 인정했는데도 안 인정했어요. 같은 문제를 두고 세 사람이 전부 다른 반응을 보인 게 좀 인상적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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