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스텔라에서 기억에 제일 오래 남는 장면은 물의 행성이다. 산처럼 솟은 파도가 수평선 끝에서 다가온다. 정말로 처음엔 멀리 보이는 산인줄 알았다가 다가오는 것을 보고 기겁하는 내용이다.
블랙홀 바로 옆을 도는 행성이라 한 시간이 지구의 7년에 해당한다는 설정도 유명하다. 몇분 있었는데, 돌아와보니 기다리던 사람은 노인이 되어 있다. 그런데 시간이 느리게 간다는 것 말고, 그 행성의 존재 자체는 성립하는 걸까?
사람이 우주복 하나 걸치고 내려서서 걸어 다니고, 물은 얼지도 끓지도 않는다. 블랙홀이 코앞에 있는데, 그게 가능한가 싶은 의문이 든다.
왜 찢어지지 않나
블랙홀이 물체를 찢는 힘은 조석력이다. 발끝에 걸리는 중력과 머리에 걸리는 중력의 차이가 크면 몸이 늘어난다. 그로 인해서 스파게티 같이 찢어진다고 알고 있다. 틀리면 알려주세요.
그런데 이 차이는 블랙홀이 무거울수록 오히려 작아진다. 지평선이 워낙 커져서 그 근처의 중력 변화가 완만해지기 때문이다.
작은 언덕은 몇 걸음만 가도 경사가 확 바뀐다. 아주 넓은 산은 한참을 걸어도 기울기가 비슷하다. 그 차이가 아닐까 싶다.
킵 손이 가르강튀아의 질량을 태양의 1억 배로 잡은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것이다. 그보다 가벼우면 밀러 행성이 찢겨져 나갔을 것이다.
천체물리학자 장피에르 뤼미네가 이 조건을 로슈 한계로 따로 계산해봤다고 한다. 물로 된 행성이 버티는 경계가 블랙홀의 중력 반지름과 비슷한 수준으로 나왔다. 그러니까 말이 안되는 건 아니다. 아슬아슬하게 성립할 수 있다는 뜻이다.
우주복만 입고 걸어다닌다
그런데 저길 사람이 서 있을 수 있느냐는 또 다른 문제다.
킵 손이 정한 밀러 행성의 표면 중력은 지구의 1.3배다. 60kg인 사람이 78kg처럼 느끼는 정도다.
무겁고 굼뜨지만 못 걸을 무게는 아니다. 영화 속 인물들이 물속에서 유난히 느리게 움직이는 게 설정에 맞게 연기한 거 같기도 하다.
사람 몸에 걸리는 조석력은 걱정할 게 못 된다. 블랙홀이 클수록 조석력이 완만해지고, 키 2m 남짓한 사람에게 걸리는 차이는 행성이 받는 것에 비하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남는 건 온도와 빛이다. 별이 없는데 물이 액체로 있고, 화면은 대낮처럼 훤하다.
킵 손의 답은 가르강튀아의 강착원반이다. 다만 조건을 하나 붙였다. 이 원반은 '빈혈성'이어야 한다. 백만 년째 새 가스를 못 얻어먹어서 활동이 거의 멈춘 원반이라는 뜻이다.
보통의 강착원반은 주면의 가스를 빨아 들이면서 수백만 도까지 달아오르고 엑스선과 감마선을 쏟아낸다. 그 옆에 행성이 있으면 표면이 남아나지 않는다.
반면 굶은 원반은 태양 표면 정도의 온도까지 식는다. 빛과 온기는 주되 사람을 태울 정도까지는 아니라는 뜻이다. 우주복 하나로 내려설 수 있는 이유가 이것 때문이 아닐까 싶다.
물론 반대 의견도 있다. 뤼미네는 여기에 토를 달았다. 그렇게 활동이 죽은 원반은 속이 훤히 비치는 얇은 가스가 된다.
우리가 아는 태양 표면은 빛이 통과하지 못할 만큼 빽빽해서 그만한 빛을 낸다. 하지만 속이 훤히 비치는 얇은 투명 가스가 태양과 같은 일을 할 수 있느냐고 질문한다. 온도는 태양만큼 맞춰진다고 밝기까지 따라오지는 않는다는 지적이다.
파도는 파도가 아니다
영화 속 장면을 다시 보면 물결이 밀려오는 게 아니라 물덩어리가 통째로 서 있다.
킵 손의 설명도 그렇다. 밀러 행성은 달이 지구에 그러듯 한쪽 면을 블랙홀 쪽으로 고정한 상태에 가깝다.
다만 그 자리에 놓인 지 오래되지 않아 완전히 고정되지 못하고 좌우로 조금씩 흔들린다. 흔들림의 주기가 약 한 시간이라, 거대한 조석 융기가 한 시간 간격으로 덮치는 식이다.
어떤 의미에서 파도가 다가오는 게 아니라 행성이 파도 밑으로 굴러 들어가는 셈이다.
뤼미네는 이 대목도 반박한다. 그 거리에서 조석 고정에 걸리는 시간을 계산하면 1밀리초라는 것이다.
그렇다는 말은 조석은 놓이자마자 고정된다는 얘기다. 그러면 흔들림도 없고, 물은 블랙홀 쪽으로 부푼 채 가만히 있게 된다. 파도 같은 건 없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영화 처음에 본 멀리 산같은 느낌 대로 그냥 거기에 있는 것이다. 몰아쳐올 위험은 없는 거다.
그 자리에는 어떻게 갔나
애초에 질문을 해야할 것은 행성의 상황이 아니라 행성이 거기에 왜 있냐는 것이다.
블랙홀 주변에서 행성이 만들어질 수 있다는 계산 자체는 나와 있다. 와다 게이이치, 쓰카모토 유스케, 고쿠보 에이이치로가 제안한 '블래닛(blanet)'이다.
블랙홀을 도는 원반 속 먼지가 별 주변에서와 비슷한 과정으로 뭉친다는 것이다. 지구 질량의 20배에서 3,000배에 이르는 천체가 7,000만 년쯤에 걸쳐 생길 수 있다는 결과가 나왔다.
블랙홀이 너무 밝게 타오르지 않아야 하고, 원반의 난류가 잔잔해야 한다는 조건이 붙는다.
다만 그 블래닛의 궤도는 블랙홀에서 4파섹 안쪽, 십수 광년 거리다. 밀러 행성처럼 지평선 코앞이 아니다.
행성이 블랙홀 주변에서 태어날 수는 있어도, 거기서 그 자리까지 어떻게 갔는지는 빈칸으로 남는다. 영화도 거기에 대한 설명은 없다.
정리하면 밀러 행성은 물리 법칙을 어긴 설정이 아니다. 대신 조건이 바늘구멍만 하다.
블랙홀은 태양의 1억 배 쯤이어야 하고, 거의 한계까지 돌아야 하고, 원반은 백만 년째 굶고 있어야 한다.
그 바늘구멍을 다 통과해도 파도는 물리학자들 사이에서 아직 논쟁 중이고, 행성이 어떻게 그 자리에 놓였는지는 아무도 답을 갖고 있지 않다.
물론 이 논쟁은 사실 의미없는 논쟁이다. 영화 속 행성이고 영화 속 설정이다. 우리가 진짜 알고 싶은 것은 실제 우주의 비밀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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